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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나의 사적인 세종 이주기 - by 유진, 봄, 상인

Sujin Lee (Daisy) 2020. 12. 21. 04:13

책 <나의 사적인 세종 이주기>  

 

지난 일 년 반 동안 회사를 쉬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어릴 적 내 꿈은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해서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일찍 죽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지 못해서 위대한 업적은 세우지 못할 것 같고, 다만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업무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을 넘어 내 척추까지 갈아 넣으며 일했다. (허리디스크를 얻었으니 척추를 갈아 넣었다는 표현이 그렇게 큰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회사에서 크게 바쁘지 않은 부서에 다닐 때는 퇴근 후 중국어 학원에 다니거나 영어 학원, 또는 주말에 경영 스터디 모임을 다녔고, 바쁜 부서에 다닐 때는 52시간 제도 시행 전의 극한의 IT업계 노동 환경을 견디며 그 와중에도 주말에 책을 읽고 블로그를 썼다. 내 인생에서 '성취'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회사를 쉬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정작 무엇을 위해 그리 애썼는지 모르고 달리기만 해왔단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의하는 '성취'는 무엇일까? 꽤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서울대/카이스트에 조기 졸업으로 가지 못했다고 자책했고, 나름 적절한 타이밍에 나쁘지 않은 회사에 다녔지만 남들이 듣자마자 아는 대기업은 아니라는 점에서 자신을 책망하곤 했다. 지난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나를 되돌아보고, 정신적/신체적으로 나를 치유해주고 내 아이덴티티를 다시 구성하는 시간을 가진 것 같다.

일을 쉬기 전 내 정체성이 싱글 회사원이었다면, 일을 그만두고 난 후의 내 정체성은 유부녀 백수였다. 내가 자조적으로 '나 백수야'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에이 너는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거지 백수가 아니야'라고 위로해줬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경단녀', '남편 따라 해외 가는 주부', '전업주부'에 내가 해당한다는 것이 사뭇 당황스럽고 죄책감도 들었다. 일하는 사람으로 내 사회적 자아를 정의해왔기에 내가 다른 자아로 정의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었고, 누군가가 나를 한심하게 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물론 나를 한심하게 본다면 딱히 그 사람에게 해줄 말도 없고 '그러든가 말든가... 왜 남을 한심하게 본대... 왜 남을 자신의 시선으로 정의한대... 할 일도 없구먼'이라고 생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 <나의 사적인 세종 이주기>를 보게 되었다. 사실 여성가족부에서 하는 '버터나이프 크루'라는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한 팀인데, 팀 간 교류하는 행사가 딱히 없었고 다른 팀 멤버는 잘 몰랐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팀 일만 하더라도 너무 힘들어서 다른 팀이 뭘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마침 저자분과 사회생활에서 만나게 되어서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신청했고,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결혼 후 세종으로 이주하여 커리어를 쌓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세종으로 간 분도 계시고, 본인의 직장이 세종으로 이전하게 되어 가족이 세종으로 이주한 경우, 그리고 세종에서 로스쿨을 다니시는 분까지 다양한 여성 서사를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남편이 있는 곳으로의 이주를 준비하고 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이 책을 만들어준 분들께 감사했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이주를 하는 여성, 또는 결혼 후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는 여성들이 겪는 고민이 잘 나와 있었고 그리고 먼저 경험하신 분들의 말을 통해 많은 위로를 얻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타지에 이주 예정인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당하거나 '여자들은 이래서 안 돼'라거나 혹은 '가서 대학원을 갈 거라고? 그냥 놀아!' 등 내 마음과 내 가치관과 다른 많은 평가를 들어왔다.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꾸려가는 분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의 그런 납작한 시선에서 비롯된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인상적이었던 구절> 

# p34
Q. 상인님에게 지속가능한 일이란 뭘까요? 
A. 버티는 거요. 열정으로 시작했어도 그다음은 버티는 것이 중요해요. 최근에 사업가이자 백만 유튜버인 신사임당 <포기하지 않는 방법> 영상의 이 말을 듣고 뼈를 심하게 맞았어요!
"열정이 식고 나면 본 게임이 시작된다. 지속력이 중요합니다. 식어버리는 열정을 만드는 것보다 지속력을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에요. (..) 열정은 고통을 마취시키고 지속력은 고통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 p105 
Editor's Note by 유진

슬로베니아에 사는 소설가 강병융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생경한 타국에서 낯선 언어를 배워야 했던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딸이 한국에 학교를 다녔으면 어땠을 것 같나요?" 라는 질문에 그는 "행복하게 잘 지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은 장소가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본인이 만드는 것이죠.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고, 조금 더 많이 공부해야 했을 테고, 어쩌면 조금 더 학원비가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겁니다. 그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저는 딸에게 그런 믿음이 늘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어디에 산다고 더 행복하란 법은 없다. 그러나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끝내 이 낯선 곳에서 잘 적응하리라는 믿음.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 내가 행복한지를 잘 아는 것에서 구체화된다. 조이님은 아이들과 함께 음악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렇게 15년 동안 음악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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